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휴이 롱 (문단 편집) == 암살 == [youtube(CHwYvHM0dMY)] 롱의 선거운동 곡인 'Every Man a King'에 추모하는 가사가 추가된 버전. 적이 많았던 롱은 항상 [[보디가드]]를 대동하고 다니며 신변보호에 만전을 기했다. 그러나 정작 자신의 본거지인 루이지애나에서 암살을 당하고 만다. 연방판사 벤자민 헨리 페이비(Benjamin Henry Pavy, 1874-1943)가 급부상하자 롱은 그를 견제하기 위해 주법을 개정했다. 그러자 페이비의 사위이자 의사인 칼 오스틴 와이스(Carl Austin Weiss 1906-1935)가 분개하여 [[1935년]] [[9월 8일]], 루이지애나 주의회 의사당 건물에서 롱을 저격했다.[* 참고로 이때 쓰인 총은 [[FN M1910]]. 바로 '''[[사라예보 사건]]의 그 총이다.''' 당연히 그 문제의 19074번은 아니다. 현재는 루이지애나의 주립 박물관에 전시되었다.] 칼 와이스는 현장에서 경호원들이 쏜 60발이 넘는 총알에 맞아 사살되었고 롱은 이틀 동안 사경을 헤메다가 [[1935년]] [[9월 10일]] 결국 사망했다. 롱의 장례식에는 무려 지지자 10만여 명이 몰려와 그를 애도했다고 한다. 칼 와이즈의 아내와 아들은 죽을 때까지 칼은 범인이 아니라고 반발했다. 이들은 휴이 롱을 쏴죽인 범인은 경호원들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도 헛소리로 매도당했다. 아내 이본 루이즈 와이스 (Yvonne Louise Pavy Weiss 1908-1963)나 아들 칼 와이스 주니어(1935-2019)는 죽을 때까지 와이즈의 무죄를 주장했다. 이본은 1935년 당시 외아들인 주니어가 태어나서 기뻐했고 9월 8일 그날도 남편은 웃으며 출근했다. 태어난 지 석 달 된 아들과 아내를 놔두고 그가 그럴 리 없다고 주장했다. 주니어는 2019년 8월 1일, 84살로 [[신부전증]]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까지도 아버지의 무죄를 주장했다. 하지만, 그런 무죄 주장에 대하여 이미 1991년, 미국 루이지애나주는 56년 동안 묻혔던 칼 와이스의 시체를 꺼내 뼈를 자연사 박물관에게 조사를 맡겼다. 와이스의 뼈 곳곳에 총알 자국이 남아있었는데 그의 뼈나 당시 기록, 현장 그림, 총까지 모두 조사한 시체 법의학 과학자 제임스 얼 스타즈(James E. Starrs)는 당시 현장 그림을 봐도 휴이 롱 등 뒤에서 쏜 총알이 확실하고 등 뒤에 있던 칼 와이스가 진범이라고 더 확고해졌다고 발표했다. 이에 아버지처럼 의사가 된 주니어와 똑같이 현재도 의사로 일하는 손자 칼 와이스 3세는 반발했지만 시체 부검결과를 상세히 보여주자 한다는 소리가 다른 시체를 부검했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했다. 지금도 이 주장을 손자 칼 와이스 3세가 계속 한다. 칼 와이스가 휴이 롱을 암살하자 오히려 페이비 판사는 정치적 입지까지 박살났다. 그래서 장인을 증오하여 정치적으로 매장하고자 휴이 롱을 죽이지 않았느냐는 소리까지 나올 판국이다. 아무튼, 칼 와이스가 진범이라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